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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겠다. 이슬람 율법의 틀 안에서…”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전세계 여론을 의식한 듯 지난달 17일 기자회견에서 여성 인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세계 언론 대부분은 이 발언에 대해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미심쩍다”라고 평했다.

실제로 한 아프간 여성이 부르카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레반에게 사살되는 일이 있었다. 10대 미혼여성이 집에 찾아온 탈레반 대원들에게 결혼을 강요 당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뉴스진행자를 비롯해 수많은 여성이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라”라는 협박을 받았다는 증언이 SNS에 쏟아졌다.

아프간 시민들이 영국군이 지키는 호텔의 철조망 너머로 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SNS 캡처, 연합뉴스


이틀 뒤 아프간 수도 카불의 한 호텔에선 아프간 시민들이 철조망 너머 영국 군인들에게 "아이만이라도 탈출시켜 달라"며 아기를 던지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아프간 시민들은 아이에게 ‘혹독한 미래’가 펼쳐지리라 예상한 것이다.

탈레반은 극단적 여성 차별로 악명 높다. 과거 탈레반 치하에서 여성들은 교육 받을 권리를 박탈당했고, 직업 얻을 자유를 잃었다. 탈레반 규율을 어겼다가 채찍을 맞거나 처형당한 여성도 부지기수다.

매니큐어를 바른 여성의 손가락을 자른다거나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면 안된다는 규율을 들어 병에 걸려도 방치하는 등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아프간 여성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

탈레반은 왜 여성을 이렇게 대하는 걸까. 이들의 생각과 철학은 다른 이슬람 국가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 걸까.

벼락스타처럼 등장한 탈레반


인구의 99.7%가 무슬림인 아프간은 정통 이슬람 국가다. 7세기 이슬람 제국 아바스 왕조가 이 지역에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1960년대에 공산주의가 아프간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는 이슬람교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냉전 시대 소련은 키르기스스탄ㆍ타지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 등을 공산화하면서 이웃 국가인 아프간에도 손을 뻗쳤다.

1978년 공산주의 세력의 쿠데타 이후 아프간은 지금까지 정치적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기나긴 세월을 전쟁에 시달렸다. 사진 위키피디아


마침내 1978년 공산주의 세력인 인민민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왕국(바라크자이 왕조)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다. 인민민주당은 대대적 사회개혁에 착수했다. 여성에게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교육을 받을 권리, 직업을 선택할 자유를 줬다. 부모 마음대로 딸을 결혼시키는 강제 결혼을 없앴다.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부르카도 벗게 했다.

이슬람교 관습을 깡그리 무시한 조치에 이슬람 세력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슬람교도들은 공산주의 사회 개혁에 강력히 저항했다.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박현도 연구교수는 “이슬람 세계관에서 개혁은 금기사항과 다름없다”며 “전통에 어긋나는 변화를 극도로 싫어하는 집단”이라고 설명했다.

이슬람 세력은 '무자헤딘'이라는 게릴라 조직을 결성해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섰다. 무자헤딘은 지하드(성전)를 치르는 전사를 뜻한다. 사진 Erwin Franzen


이슬람 세력이 ‘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고 공산주의 정권에 ‘지하드(성전)’를 선포하면서 아프간은 내전에 휩싸였다. 1979년 소련은 공산주의 정권 요청에 따라 아프간을 침공했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무기를 공급했고 군사교육을 도왔다. 무자헤딘의 끈질긴 게릴라전에 지친 소련은 1989년 철수했다. 소련 철수 이후에도 정부군과 이슬람 반군 간 기나긴 내전이 이어졌다.

그 와중 벼락처럼 등장한 세력이 탈레반이다. 탈레반은 아프간 최대 민족인 파슈툰족 말로 ‘학생들’이라는 뜻이다. 이슬람 신학교에서 원리주의(原理主義)를 받들며 공부한 학생들이다.

내전으로 집과 부모를 잃은 가난한 파슈툰족 아이들은 탈레반의 비호 아래 교육을 받고 전쟁에 투입됐다. 이들은 학교에서 이슬람 율법과 함께 사상 교육을 받으며 소련군과 공산주의를 향한 복수심을 키웠다. 당시 그들이 배운 산수ㆍ과학 등의 교과서는 미국이 공급했다. 탈레반은 총과 총알, 무기를 세면서 숫자를 익혔다. “소련군 3명 중 한 명이 탈레반 전사에게 죽었다. 남은 이는 몇 명인가”와 같은 예제로 덧셈과 뺄셈을 배웠다.

미국에게서 제공 받아 탈레반이 사용한 산수 교과서. 탈레반 학생들은 무기로 숫자를 익혔다. 사진 미국군사박물관


소련군 철수 후 아프간엔 군인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통행세ㆍ자릿세 등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세금을 걷으며 사람들을 착취했다. 탈레반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따라 이상 국가를 건설하겠다며 아프간인의 환심을 샀다. 도로를 건설했고 지역 개발 사업을 벌였으며, 군인의 고질적인 부패를 없앴다. 탈레반은 전쟁으로 지친 아프간 사람들 마음을 달래주는 ‘스윗한’ 존재였다.

1994년 10월 등장한 탈레반은 아프간 국민의 열광적 지지 속에 한 달 만에 아프간 남부 대도시 칸다하르를 장악했다. 2년도 되지 않아 수도 카불을 함락했고 이슬람 국가 건설을 선포했다.

가장 과격한 이슬람 전통을 이어받은 탈레반


탈레반은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파키스탄 이슬람 전통을 흡수했다. 여기에다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의 영향을 막으며 세력을 키운 사우디 종교 이념 와하브파 사상(와하비즘)이 스며들었다. 이슬람 원리주의의 한 분파인 와하브파는 지나친 배타주의와 심각한 여성 차별주의로 악명이 높다.

탈레반의 이러한 과격한 뿌리는 정권 장악 후 곧바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면서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엄격하게 적용하며 비인간적 처벌을 일삼았다. 살인범과 간통범을 공개 처형했고, 물건을 훔치면 손발을 잘랐다. 영화와 음악 같은 예술 활동은 하는 것도 즐기는 것도 금했다. 놀이와 여가 활동을 제한했다. TV나 각종 미디어 시청도 금지했다. 심지어 연날리기와 체스 같은 일상적 활동도 금했다.

탈레반 치하에서 여성들은 즉결 처분으로 처형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진 아프간여성혁명연합


특히 여성들에게 유독 잔혹하고 엄격했다. 샤리아 자체가 여성 차별 대우를 명하고 있지만 탈레반은 정도가 심했다. 샤리아는 이슬람 경전 ‘코란’과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고대 경전인 만큼 추상적이어서 샤리아를 일상에 적용하기 위해선 율법학자 해석에 의존해야 한다. 샤리아 해석은 각 이슬람 국가의 관습, 부족의 풍습에 따라 다르다. 같은 이슬람 국가더라도 터키인과 아프간인의 생활 방식은 천지차이다.

여성을 인격적 존재로 보지 않는 ‘파슈툰왈리’


샤리아만으로도 충분히 여성 차별적인데, 탈레반은 여기에 한술 더 뜬다. 탈레반을 구성하는 부족인 파슈툰족의 관습법 ‘파슈툰왈리’ 때문이다. 파슈툰왈리는 고대부터 내려온 파슈툰족의 불문율로 일종의 사회 규범 역할을 한다. 친구를 환대하고 의리를 지키며, 적에게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지키지 못해 부족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 한다. 박현도 교수는 “탈레반이 미국의 폭격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준 것도 친구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파슈툰왈리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프간의 파슈툰족은 여성을 독립적 존재로 보지 않고 남성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 보호의 정도가 지나쳐 일말의 자유조차 주지 않는다.


파슈툰왈리의 또 하나 중요한 가르침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여성을 보호한다’이다. 파슈툰족은 여성을 독립적 존재로 보지 않고 반드시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 남성의 허락 없이 여성은 밖으로 다니지 못하고 결혼도 할 수 없다.

결혼 역시 두 독립적 인간의 인격적 결합이 아니라 남성이 피보호 여성을 선택하는 행위에 가깝다. 아프간의 오래된 격언 중엔 “여성의 첫 생리는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남편의 집에서 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가족 내 여성이 이러한 규율을 어기면 파슈툰족은 가족의 명예가 실추된 것으로 여겨 여성의 목숨을 빼앗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하미드 칸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교수는 “파슈툰족은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동생이나 형이 죽으면 그 아내를 물려받거나, 사촌끼리 결혼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설명했다.

온몸을 부르카로 가리고 밖을 나서야 하는 아프간 여성들. 사진 AP=연합뉴스


아프간은 우리와 달리 부족제 국가로 중앙집권적 통치 경험이 적다. 국가의 사법 체계와 행정 시스템보다 부족 차원의 결정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 이 때문에 샤리아와 파슈툰왈리에 따라 부족이 내린 형사적 처벌이 집행되는 일이 잦다. 여성이 부족 명예를 실추했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부족 주민들이 임의로 여성을 살해하는 ‘명예살인’이 빈번하게 이뤄진다. 박현도 교수는 “탈레반은 이슬람교의 겉옷을 입고 있지만, 속은 파슈툰왈리의 관행에 따라 움직인다”며 “이 때문에 다른 나라의 이슬람교보다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다”고 말했다.

아프간의 여성 인권 수준은 세계 최하위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성 격차 지수는 2021년 156개국 중 156위, UNDP의 성 불평등 지수는 189개국 중 169위다.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현지 여성 운동기구에 따르면 부족 전통 속에 갇혀 사는 아프간 여성이 오히려 여성 인권 운동을 거부하는 일도 빈번하다고 한다.

여전히 어두운 아프간의 미래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한 아프간 여성 인권 향상은 요원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아랍여성협회 사무총장인 리나 아비라페 박사는 “아프간 여성들은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않고 있다”며 “그들은 악순환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아프간에서 활동 중인 여성인권단체 이퀄리티 나우(Equality Now)의 야스민 하산 사무총장은 “지난 20년간 아프간 여성 인권을 높이기 위해 많은 단체가 엄청난 작업을 해온 결과 여성들이 경찰이 되었고 판사ㆍ장관이 됐으며, 국회의원을 배출했다”며 “하지만 탈레반 집권 후 이런 노력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고 했다.

그나마 아프간인들은 카불 북부의 도시 판지시르에서 시작된 저항군 ‘민족저항전선’의 반격에 기대를 건다. 무자헤딘의 지도자이자 판지시르의 사자라고 불리던 아프간 전쟁 영웅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아들이 저항군을 이끌고 탈레반에 맞서고 있다. 박현도 교수는 “외부의 도움 없이 저항군의 힘만으로 탈레반을 물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현재 아프간을 둘러싼 여러 나라가 아프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어 외부의 개입에 따라 변수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영상=김지선·정수경·이세영 PD, 김지현·이가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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